건강 | 광덕 스님의 제자 송암 스님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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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9-30 11:18 조회13,564회 댓글0건본문
바야흐로 老年을 맞이하며
Ⅰ. 서언
1. 지구가 인간학교라면 난 학생
바야흐로 늙음에 대해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로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다.
잘 늙으려면 젊은 시절부터 잘 살아야 하는데 내 자신을 돌아보면 잘 산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지금부터라도 마음을 가다듬어 힘닿는 데까지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 더욱 절실해졌다. 나이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여생을 제대로 늙어가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여간 독한 결심을 하지 않고는 말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젊을 때는 안중에도 없던 일이 나이가 듦에 큰 일로 다가온다.
나이 값, 밥 값 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늙어 감을 피할 수도 없다.
피할 수 없는 이 일을, 이제 내 일로 맞이해야 함에 평소 주변의 늙음을 보고 느꼈던 점을 교훈으로 삼으려고 한다.
주변의 선배 노년들이 거울이 되어 준 셈이다. 그리고 내 자신의 신체적 변화도 속속 경각심을 일깨운다. 해서,
그동안 조금씩 메모해 놓은 노트를 다시 꺼내 읽고 정리하며 각오를 다진다.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저 세상이 아닌 이 세상에서 말이다. 언젠가는 맞이해야 할 더 큰 일을 위해서라도 늙음을 적극적으로 맞이해야 하리라. 그 때를 위한 사전 훈련이 되고 연습이 되도록.
아무쪼록 지구학교를 졸업하는 그 날이 오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돌아보면 지구학교에서 나의 선생님은 훌륭하셨는데, 학생인 내 자질이 미치지 못하고 게을러서 그만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내 가슴에는 모범생이 되고 우등생이 되고픈 마음은 여전하다. 그 마음이 나를 사로잡고 있다. 출가 후에 잊어본 적이 없다. 이제 그걸 다시 밑천으로 삼아야 하겠다. 비록 늦은 일이긴 하지만.
2. 세상의 공증을 받고 감시를 받고 싶다
점점 나이 들어보니, 늙음은 말할 수 없는 불편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쉽사리 잊어버리고 행동은 굼뜨고 남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할 뿐 아니라 곧잘 오해도 한다.
신체적인 여러 한계에 부딪쳐 때로는 좌절하기도 한다. 하나 둘이 아니다. 늙음이 고(苦)라는 사실을 젊어서는 인정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사정이 다르다.
아무튼 이런 노화현상[老症]을 관하여, 내 자신이 이미 늙었음을, 점점 늙어 감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적어도 늙어 가는 내가, 마치 젊은 것처럼 또는 늙지 않을 것처럼, 착각은 하지 않아야 하리라고 속다짐을 한다.
더구나 나는 도 닦은 신분이지 않은가? 그리고 늙음이 좋건 싫건 운명적으로 얼싸 안아야 할 때도 되었고.
따라서 이제 내 자신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더 바르게 행동하고 더 정직하게 말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순전히 나를 위해서다. 나아가 세상에 대한 작은 예의이기도 하고 나이가 주는 질서에 대한 책임이고 의무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의 다짐을 글로 공개하여 세상의 공증과 감시를 받으려고 한다. 말하자면 내 스스로 물러설 수 없는 배수진을 치는 것이다.
3. 자신이 짓고 받는 것이 인생
인간 누구나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아슬아슬 할 때가 많을 것이다. 그런대도 무사히 지나갔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런 속에서도 오늘까지 각자 살아온 것은 세상이 자비롭기 때문이다. 세상의 은혜다.
이런 세상의 법칙은 인과다. 인과는 업에 따른다. 설령 어떤 일을 당했거나 겪었다 해도 자기가 원인을 지어 그 결과를 받은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인생들은 자기 얼굴대로 산다. 얼굴은 자신이 지은 업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신체부위이다.
자기 얼굴을 벗어나는 삶은 극히 드물다. 이처럼 자기 인생은 가장 먼저 자기가 안다. 자신의 생각이 일어나고 멸하는 것을 살피면 알 수도 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으로 이미 자신의 앞길을 알고 무의식중에 내뱉는 말로 앞날을 짐작한다.
그럼으로 결코 남 탓을 하거나 세상 탓을 해서는 안 된다. 원인제공과 진행과정과 최종결과, 이 모두를 온통 자신이 차지하고 있고, 자신이 배당받아야 할 몫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남은 삶을 내 의지로 경영하고 내 뜻으로 개선해 보고 싶다.
그리고 삶의 등식은, ‘인생(人生)은 고생(苦生)’이다. 하나같이 예외가 없다. 편한 인생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는 말이다.
그럼 왜 태어나서 피할 수도 없는 그 혹독한 고생을 치뤄야만 하는가?
그건 너나없이 정신의 향상을 위해서다. 인간본성[진리]에 복귀나 본성의 표현이다. 이것이 인생의 이유이고 고생에 내포된 진실이다. 고생은 고생이 아니라는 말이다.
노년이 되면 도를 닦지 않았어도 이 뜻을 짐작한다. 그러나 진즉 알면 훨씬 더 뛰어날 수 있다. 좀 더 일찍 이 사실을 ‘아느냐, 모르느냐?’ 또는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차이는 크다. 인생성패[성인과 범부]가 달렸다.
그럼으로 이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하늘과 땅만큼 벌어진 차이다. 결국 인간의 마음가짐이 당사자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운명이 된다. 자기운명은 자기마음이 짓는다.
Ⅱ. 노년의 철학, 자연 그리고 명상
1. 철학이 있는 늙음은 존경의 대상이 된다.
불경에 ‘머리가 희다고 장로가 아니다’라는 말씀이 있다. 무턱대고 절에서 오래 살았다고 대접 받진 못한다. 나 말이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불교사상으로 내 인생철학과 삶의 기준을 더욱 튼튼히 해야 한다.
누가 봐도 흔들림 없는 소신, 굳은 신앙심을 가져야 한다. 육체적인 한계[늙음] 앞에서 출가자인 내가 정신력을 발휘할 마지막 기회이고 최종적인 일이 바로 이 신앙심[철학] 강화일 것이다.
2.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내가 차츰 늙어 갈수록 늙음에 대한 인생철학이 더욱 확고해야 한다. 우선 늙은이 티를 내지 말아야 한다. 늙음을 이해해 달라고 주변에 부탁하거나 구걸하거나 통사정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노인기(老人期)가 나를 바로 할 수 있는 기회고 고치거나 개선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 마지막 기회라고 가슴에 새겨야 하리라.
늙음을 핑계로 주변 사람들에게 은근히 양해를 구하지 말자. “늙으면 소용없어!”, “늙으면 죽어야 해!”하는 식으로 나의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내 자신의 정신력 부재를 늙음 탓으로 돌리지 말자는 것이다.
나의 힘이 닿는 한 도 닦듯이 늙음에 대해서도 책임감 있게 살자. 사람은 자신을 단속하고 절제하지 않으면 인간이 못 될 수도 있다. 어쩌면 ‘도 닦는 것’은 단속하고 절제하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수행은 참인간이 되는 일이고 그 길이다.
늙어 죽을 그 마지막 순간까지 수행하자. 사람이 늙어서 하는 일 중에 가장 멋진 일, 위대한 일은 ‘도 닦는 일’일 것이다. 하늘에 태어날 복 짓는 봉사마저도 접자. 오로지 자신을 살피는 일이 절대다.
3. 늙음에 감사해야 한다.
늙음은 손해 보는 일만은 아니다. 젊을 때 모르던 것을 알게 되고 젊을 때 잘못한 것을 비로소 깨달아 참회도 한다.
나이가 든 만큼 인생의 폭과 깊이가 그렇게 달라진다. 실지로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 아찔할 때도 많다.
마치 외나무다리를 건너 듯 아슬아슬하게 살았다. 그렇지만 세상이 보호해 주고 자비로 감싸주어 여태껏 살아온 것이다. 비단 나뿐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시중에는 ‘청춘을 젊은이들에게 그냥 주기는 아깝다’는 말이 돈다.
늙음, 얼마나 고귀한가? 내 자신과 타인에게 겸손할 수 있고 세상에 감사할 수 있으니. 무엇보다 이 생을 졸업하면 다음 생에 더 좋은 곳에 태어날 희망이 있지 않은가? 이 어찌 감사하지 않겠는가.
4. 사람을 만나면 먼저 웃는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노인기[60세]에 들어가는 나는 사람을 만나서 처음 건네는 인사는 말이 아닌 웃음이어야 한다.
내 늙은 얼굴의 주름에 웃음을 더하면 깊은 자비와 사랑의 골짜기가 될 것이다. 만약 내 늙은 주름에 찡그림을 더하면 목불인견의 흉물이 되고 말 것이다. 말하기 전에 먼저 웃으리라.
웃음은 노인이 되어가는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말, 웅변이다.
5. 자연 속에서 산다.
사람이 늙게 되면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연은 모든 것을 안아 주고 감싸 준다. 느리다고 둔하다고 내치지 않는다.
숲과 흙은 늙음을 잘 보호해 준다. 반면 시멘트나 아스팔트는 늙음의 보호처가 되지 못한다.
사람이 늙으면 설 자리 앉을 자리가 정해져 있고 그것도 제한되어 있다. 이런 면에서 늙음이 돌아가 의지하고 안길 곳은 도회지가 아니고 자연이다. 비록 병원이 멀어도 괜찮다. 나고 죽는 사생관(死生觀)만 딱― 서 있으면 병원 열 곳도 부럽지 않는 곳이 자연의 품이다. 자연은 늙음에 몹시 관대하다.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설법 중에 말한 적도 있다. 만약 서울에 65세 이상의 노인들만 자연으로 돌아가면 우리의 서울이 얼마나 살기 좋은 쾌적한 공간이 될까. 젊은이들에게 서울을 양보하고 초연히 자연 속으로 돌아가며, “너희들 돈 벌어 아이들 잘 키워라. 나는 돌아가리라. 저, 자연의 품으로”라고.
현대판 귀거래사를 읊조린다면 아마 서울은 지상의 낙원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만든 것이 이곳 도피안사 미타촌(彌陀村: 壽光院)이다. 너무 이상적인가? 아니다. 늙은 내 요람이고 보금자리다.
6. 명상은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는 힘을 준다.
결국 인간은 혼자 가야 하지 않는가. 혼자 갈수 있는 힘을 명상에서 기른다. 자신을 돌아보아 가다듬으며 다음 생을 준비한다. 여태껏 밖의 일한다고 안의 일을 무척 소홀히 한 삶을 청산하고, 안의 일에 일로매진(一路邁進)하는 것이 명상이다. 이렇게 마음을 정하면 안의 일을 소홀히 할 겨를이 없다. 이미 많이 늦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마을의 경로당은 자칫 대기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늙음을 자각한 순간, 앞으로의 여생은 마지막 준비이고 마지막 기회가 된다. 좌고우면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아, 너무나 벅찬 한 순간 한 순간이 아닌가?
Ⅲ. 노년의 생활과 건강
1. 채식위주의 식단과 적당한 식사량
만약, 노부부가 자연의 품에 안겨 살며 조그만 터 밭이라도 장만하여 자신들이 먹을 채소라도 가꾸면 거기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젊은 시절 뭘 했던 불문에 부치고 호미를 들고 채소를 가꾸면 채소만 얻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말없이 우리에게 이치를 일깨우고 삶의 깨달음을 전해 준다.
또 먹고 남으면 도회지에 살고 있는 자식들이나 지인들에게도 나눠준다. 때를 맞춘 식사시간과 적당한 식사량, 몸소 가꾼 것을 나누는 보시행은 노년의 몸과 마음을 안온하게 할 것이다.
늙음과 자연에서 얻는 부부 열반행로이다. 비록 내가 출가자이지만 나이가 더 들면 모든 소임에서 손을 떼고 자연인이 될 것이다. 저 노부부처럼 말이다. 사부공동체인 도피안사 수광원[사부대중의 구성체]의 구성원이 되어 조용히 없는 듯이 살아야 한다.
2. 풀 뽑기 등의 가벼운 일, 주로 걷고 맨손체조를 자주한다.
터 밭을 가꾸면 많은 이익이 있다.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진지해 진다. 거기서 오는 경건한 즐거움은 세간의 쾌락적 기쁨과는 다른 차원이다. 그러나 일에도 욕심을 내지 않아야 하고 운동도 무리하지 않는 부족 가운데 만족이 노계(老戒)다. 모든 것이 적절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자기성찰의 수행으로만 조절이 가능하다.
3. 글쓰기와 책읽기를 한다.
자연 속에 살면서 일기를 쓴다거나 주제를 잡아 수필을 써 보는 일은 또 다른 즐거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젊은 시절에 읽었던 책들, 특히 감명 깊었던 책을 찾아내어 다시 읽어보면 맛이 다를 것이다. 비록 같은 책이고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다르다. “이 무슨 도리인고?”
4.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1)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다.
2) 남의 신세를 지지 않는다.
3) 말을 삼가고 듣는 것을 즐겨한다.
4) 호오(好惡)의 감정표현을 자제한다.
5) 타인의 장점을 본다.
6) 매사에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다.
7) 내 자신을 싹― 비운다.
5. 수시로 몸의 긴장을 풀어준다.
늙으면 저절로 몸에 힘이 들어간다. 몸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해서다. 그런 몸은 더 긴장한다. 몸에 필요 없는 힘이 들어간 상태에서는 쉬질 못한다. 쉬지 못하면 곧 병이 온다. 그럼으로 잠간의 명상을 통해서 몸을 이완시켜 주고 틈틈이 체조를 해서 몸에 힘을 뺄 일이다. 진정한 쉼은 노는 게 아니고 명상이다.
6. 어떤 일도 계획하지 않는다.
먼저 내 자신의 노년기[시기: 65, 70세 등]를 정한다. 그 때부터는 탈속한 경지로 산다. 그야말로 유유자적이다. 감히, 금선(金仙)이 될 것이다.
뭘 계획하고 노력하는 삶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삶을 달게 받아들여 감사하게 생각하며 즐겁게 산다. 아무런 부담감 없이 산다는 뜻이다. 그런 나나 노인들을 무사한인(無事閑人)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망발이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7. 하던 일은 넘겨준다.
아버지와 아들이 있고 스승과 제자가 있고 선배와 후배가 있다. 바야흐로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물려주라는 이치다. 평소에 준비를 했다가 시점을 잡아 물려준다. 때를 놓치면 안 된다. 역사발전이 더디다. 따라서 사람이 나아가고 물러섬은 인간 세상에 매우 중요한 절차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다.
8. 순례나 여행을 다닌다.
견문각지(見聞覺知)는 깨달음이다. 순례나 여행은 그런 깨달음이다. 부처님성지를 순례하거나 불적지를 참배한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이나 시간을 피하여 새로운 환경이나 자연의 풍광 앞에 조용히 서 본다. 미처 느껴보지 못했던 감회가 있을 것이다.
재화(財貨)는 깨달음을 위해 쓰여야 한다. 인류의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감각과 관능을 따라 사는 삶은 아무리 화려해도 깊어질 수가 없다. 난 늙음을 앞 세워 몸 편한 것을 택하지 않으려고 한다. 늙어가도, 아니 숨 멈추는 그 순간까지 깨달음을 추구해 갈 것이다. 무소의 뿔처럼.
9. 병원엘 가지 않는다.
난 스스로 내 수명을 조절하고 싶다. 먹는 것과 병원출입 조절로 가능하다고 믿는다. 선사(先師)께서 73세에 사세하셨으니 나도 일흔 세 살이 되면 식사와 병원출입을 조절할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아직은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봐야 할 일이 있다. 지병인 고혈압과 당뇨가 있어서이다. 이 점에 대해서 입장 정리가 되면 실행할 수 있다.
아마 현 추세로 나가면 인간의 수명 100세까지는 누구나 살 것 같다. 늙음의 연속적인 불편 속에 100세가 과연 좋기만 한 걸까? 세간에서는 농반 진 반으로 ‘개똥밭에 굴러도 이 세상이 좋다’는 말을 한다.
인간의 자존심을 뺀 말이다. 자존심이 빠진 인간은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 의당, 왔으니 가야 하는 게 정한 이치인데. 뭘, 그렇게 가지 않으려고 자존심을 버리고 곁눈질까지 하려 하나? 내가 허튼 생각을 하면 이렇게 추궁하고 닥달할 것이다.
10. 최소한의 생활을 한다.
더욱 근검, 절약으로 여생을 산다. 내 자신에게 검소해야 하고 절약해야 하는 까닭은 우선 나를 위해서다. 내 자신의 마음을 거칠게 하지 않기 위해서.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면 내 마음이 거칠어지고 황폐해 진다. 그러나 남에게는 후해야 한다. 어떤 성인도 남에게 인색하고, 절약한 적이 없다.
11. 몸에 좋은 식품이나 약을 취하지 않는다.
난 늙어서 보약 먹지 않을 것이다. 규칙적인 생활과 절제된 삶이 최상의 보약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이 소중해도 허욕을 부리면 안 된다. 설령, 건강하다고 해도 어린 아이들처럼 줄곧 뛰어다닐 수야 있겠는가?
물론 마라톤도 할 수 있고, 더 이상의 큰일도 할 수 있을 것이지만 남은 시간과 노력을 어디에 쓰느냐가 중요하다.
12. 꽃이나 나무를 가꾼다.
자연에는 이치가 들어 있다. 인간의 이치와 상통한다. 그 자연의 이치를 깨달으면 인간의 이치도 알게 된다. 터 밭에서 식물을 가꾸면 채소만 얻는 것이 아니다. 곧 인생을 찬미할 것이고 늙음을 더욱 소중히 할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삶은 이처럼 늙어서야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늙음은 인생의 결실과정이다. 수행하는 노인은 늙을수록 대접 받는다. 장로(長老)가 된다.
Ⅳ. 노년의 대인관계
1. 젊은 사람이 식사대접을 한다고 하면 흔쾌히 맞이한다.
다만 식사 후에 살그머니 일어나서 얼른 식사비용을 지불한다. 남에게 식사대접 받는 일이 잦으면 고맙다는 생각보다 자칫 뻔뻔스러워지거나 비굴해지기 쉽다.
둘 중 하나다.
매우 분명한 것은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사실이다. 늙어서 남에게 대접 받아서는 안 된다.
갚을 날도 없으려니와 이제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은혜 속에 살았는가?
더 뭘 신세를 끼치려고 하는가. 물론 거기엔 경제적 준비가 있어야 하겠지만 이미 준비된 삶인 것으로 보고 하는 말이다. 나는 어쩌다가 청을 받아 강연을 나가도 사례를 받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받은 것도 많으니까.
돈 가진 노년들이 사회를 위해서 기꺼이 기부해야 할 것이다. 노년에 하면 더욱 좋다. 노년의 멋이고 노덕(老德)의 나부낌이고 사회의 빛이며 낙조의 아름다움이다. 과연 나의 모습이 될 수 있을까?
2. 얼마의 돈은 있어야 한다.
내 자신의 호주머니에 간직한 얼마의 돈은 죽을 때까지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그 돈으로 불사(佛事)와 사회적인 선행을 하려고 한다. 늙어서 보람을 가질 수 있는 흐뭇한 일이 되고 자부심이 생기고 위안이 된다.
노년의 존재감이기도 하다.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넌지시 차비를 쥐어 주고 만나는 사람에게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서 얼마의 돈은 꼭 있어야 한다. 노인의 덕행은 저승길을 닦는 것이고, 후생을 복되게 하는 이자 높은 저축이다. 출가자인 나도 예외는 아니다. 출가자도 복이 있어야 공부도 잘 되고 불사도 원만하다.
3.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며 주변을 챙기고 후생을 발원한다.
노년기에는 반드시 도를 닦는다. 도 닦음이 ‘자신을 아는 일’이라면 노년을 알기위해서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도를 닦아야 한다. 인생을 정리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정리되지 않는 창고는 쓰레기장이듯이 정리되지 않는 인생도 그럴 수밖에.
도 닦는 일은 인생을 가다듬고 새로운 희망을 키우는 일이다. 또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보다 옛 친구를 만나 지난 이야기를 나눈다. 향기로운 인품은 어린 시절 벗을 소홀히 하지 않는 법이라고 한다. 인간의 진실, 인생의 상도(常道)에 어찌 ‘출가, 재가’의 구별이 따로 있을까.
4. 가능한 세간[大處]에 나가지 않는다.(山門不出)
늙음도 단계가 있고 정도차이가 있겠지만 몸을 가누기 어려운 단계에는 가능한 나다니지 않아야 한다. 긴히 나가야 할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말고 자가용을 이용하며 주변의 도움을 받는다. 선조들은 한 번 산문을 들어서면 죽을 때까지 산문을 나서지 않았다. 선지식들이 나에게 보인 삶이다.
5. 앉고 일어설 때 신음소리를 내지 않는다.
젊은 시절에는 늙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이 겪어보지 않은 일, 특히 늙음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아니, 까마득히 모른 채 겨우 짐작만 할 뿐이다. 젊은이들에게 이해 받지 못하는 행동[끙끙]을 반복한다는 것은 나이에 대한 자존심을 잃고, 노년의 체통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다.
노년의 입에 달린 습관일 뿐이다. 젊음들은 ‘늙으면 으레 저런다’로 치부해 버리고 만다. 자존심 상하지 않은가? 늙어 자존심을 잃으면 인생을 잃는 것이다.
6. 가능하면 아프다는 소리도 내지 않는다.
이 역시 같은 맥락이다. 늙음은 혼자 오지 않기 때문이다. 병과 오고 쇠약과 같이 온다. 병약과 노쇠가 늙음의 삶이고 일부이다. 밀착된 벗이다. 달래가며 추슬러가며 살아야 한다. 신음을 입에 달고 살지 말자.
자존심과 관계되기에 말이다. 노년의 진정한 자존심은 후대에겐 교훈이 되고 자신에겐 성숙이 된다. 더욱 중요한 점은 노쇠와 병약은 죽음을 성취하는 관건이다. 부처님께서 춘다를 축복한 사실을 어찌 모른다 하랴.
7. 젊을 때의 성질과 습관을 버린다.
젊을 때부터 익혔던 습관―, 과음하고 과식하고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생활하고……, 끝내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을 듣는다. 어느 때보다 자존심을 지켜야 할 노인기에 이 말을 들어서는 안 되리라.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자신을 면밀하게 돌아보아 반성하고 고치는 것이다. 이는 오로지 내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수행을 하는 것이고 반성하여 자신을 가다듬는 일이다. 인생의 성공, 그 바로 메타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존경받는 것.
인간의 공도(公道)에는 예외도 없고 특권층이나 차별도 없다. 의당 출가자인 나도 그렇다.
8. 묻지 않는 말을 하지 않는다.
아는 체 하지 않는다. 잔소리로 들린다. 노인들이 보기에 세상이 금방 끝날 것 같지만 그러나 쉽게 망하지 않는다.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망할 세상은 망해야 할지도 모른다. 오로지 자신의 일에 충실하면 된다. 오히려 노년의 산 같음이 세상을 구하는 일이다.
9. 젊게 살지 않는다.
알고 보면 인생은 늙기 위해 살고 죽기 위해 산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태어난 존재가 죽지 않을 수는 없다. 담담히 맞이해야 한다. 자신의 변화를 슬퍼하지 않아야 하고 마음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젊고 늙음은 육체의 일이다. 육신은 늙어도 마음은 젊음 그대로다. 따라서 누구나 마음[욕망]처럼 젊게 살고 싶어진다. 돈이 있으면 성형도 한다. 그러나 겉은 성형이 되지만 속은 성형이 되지 않는다.
의학이 발달하여 속도 갈아 끼우는 성형이 된다 해도 언제인가는 그도 한계를 맞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일찌감치 받아들여라. 인간이 끝없이 산다고 해도 만족이 되겠는가. 착각하거나 욕심내면 주책을 부리게 된다.
부디, 늙음을 받아들여라. 그렇지 않으면 분수를 몰라 사람들의 빈축을 산다. 젊은이들에게 교훈이 되기는커녕 웃음거리가 된다. 끝내 밥값도 못한다.
이런 점을 숙지하여 내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오로지 마음을 몸에 맞추자. 젊은 시절에는 몸을 마음에 맞췄지만 늙어서는 마음을 몸에 맞춰야 한다. 마음을 몸에 잘 맞추면 둘이 아니게 된다. 그러자면 자신의 늙은 몸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매사에 조심하며 욕심 부리지 않아야 한다. 늙음의 욕심을 노욕(老慾)이라고 하여 추물(醜物)로 여긴다.
일상에 조심하여 사는 것은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타도 출퇴근 시간을 비켜서 이용하고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릴 때도 난간을 잡고 한 쪽으로 비켜서 다닌다. 길 가운데를 다 차지하지 않는다. 늙으면 더욱 겸손해져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제 어쩔 수 없이 인생후배들에게 거울이 되어야 할 나이[때]가 되었기에.
10. 인심을 후하게 쓴다.
손님이 집에 선물을 가지고 오면 흔쾌히 받되, 돌아갈 때는 차비를 선물 값보다 더 준다. 혹시 남의 집에 갈 때는 빈손으로 가지 말아야 한다. 신세진 사람에게 명절을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노년의 배려는 존장(尊長)의 칭호를 얻는다. 나를 과연 세상 사람들이 출가노덕(出家老德)이라고 할까? 지금 내가 그런 행을 짓고 있는가?
11. 자주 목욕을 한다.
어린 아기에게는 향기가 나고 늙은이에게는 냄새가 난다. 자주 씻고 옷을 깨끗하고 단정하게 입는다. 늙어가면서 주변에게 피해를 주지 않음을 제일로 삼아야 한다. 이타의 근본이다. 선행에 앞서 피해를 주지 않고 폐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
12. 여럿이서 산다.
늙을수록 대중생활을 한다. 실버타운이나 동네에서 이웃들과 자주 어울릴 수 있어야 한다. 남은 나의 거울이다. 혼자 살면 거울이 없게 되고 거울이 없으면 자기를 모르게 된다. 자기성장이 중지된다.
만약 사람이 오래 살아야 할 까닭이 있다면 오로지 자기성숙을 위해서다. 도를 얻기 위해서다. 사람으로 한 번 태어나기가 몹시 어려우니까.
13. 남을 비난하지 않는다.
주변과 시비를 가리거나 남의 흉허물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옳고, 그름’을 떠나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남을 대한다. 늙음의 따뜻한 눈, 젊은이들에게는 없는 눈이다. 이제부터 거울 앞에 서서 찾아보자. 나의 따뜻한 눈빛이 어디에 있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 가를.
14. 과격하면 안 된다.
늙어서 무엇보다 내가 조심해야 할 것은 과격한 언행이다. 화를 벌컥 내거나 사소한 일에 쉽게 짜증을 내면 안 된다. 나이 값을 못한다고 외면당한다. 내 한 평생의 삶과 인품을 송두리째 의심받는다. 심지어 존재마저 의심받고 부정된다. 노인과 도인은 같다.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 나는 도의 문중이지 않은가?
15.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특히 공적인 자리일수록, 젊은이들에게 양보한다. 오히려 늙음을 미안하게 생각해야 한다. 젊게 산다는 명목을 내세워 자리를 차지하거나 오래 유지하려고 하면 젊은이들 일자리를 뺏는 일이 된다. 늙어 어찌 악덕을 행하겠는가. 젊은 인생들에게 내줘야 한다. 돈 벌어서 자식 키우고 부모 모시고 살 수 있도록. 그것이 선배의 도리이다. 노년이 되면 저절로 선배의 자격을 얻는다. 한사코 뿌리치고 싶어도―.
16. 아이에게도 배운다.
나는 ‘내가 노인이다’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 것이다. 세 살 난 어린이에게도 배울 점이 있어서다. 겸허해야 가능한 일이다. 늙음은 살날이 많지 않기에 순간순간 진지하다. 그 점을 적극 이용해야 노년기에 결실이 크다. 노년은 인생의 완숙기다. 노덕의 광휘(光輝)가 찬란할 수 있다.
17.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특히 젊은 사람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칭찬은 반드시 근거를 가지고 해야 하고 바로 하면 좋다. 마음을 다해서―. 노년이 갖고 있는 경험과 년륜 등을 모두 기울여서.
18. 건강은 좋아지지 않는다.
육체의 노쇠와 병고에 대해서는 몸을 추슬러 달래가며 버틴다. 아무리 노력해도 젊음은 다시 오지 않기에. 고향으로 떠나는 그 날, 그 순간까지 달래고 버틴다. 아, 이 얼마나 대단한 수행인가.
19. 각 절에서 노인수행공동체를 만든다.
부부가 함께 절에 들어가 최소한의 수행을 하면 우리 사회의 노인문제가 저절로 해결된다. 불교가 인생문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훌륭한 일이 될 것이다. 노인수행공동체 수광원처럼.
Ⅴ. 유언, 임종, 장례에 대하여
-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옛 수행자들은 며칠 길을 떠나도 자신의 방을 깨끗하게 정리해 놓았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지 오래다. 수행자는 어느 때라도 그 일을 염두에 두고 준비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
1. 유언의 중요성
내 몸을 내 의지대로 할 수 없었을 때, 내 말[유언]에 따르고, 유언에 없는 것은 승규(僧規)에 따르고, 그래도 부족한 점은 일반상식에 따라 처리한다.
2. 광덕스님 환생후신 ‘光린포체’
선사(先師:광덕스님)께서는 말년에 “다시 와서 새불교운동 하겠다”라고 다짐 두셨다. 선사의 뜻하심[환생]을 받들어, 다시 오실 몸[광덕스님: 光린포체]을 기다려 내가 준비한 일이『광덕스님시봉일기』시리즈와 이곳 도피안사(到彼岸寺)와 일련의 일들이다. 따라서 내가 창건한 이곳 도피안사와 내가 해오던 모든 일과 내가 사용하던 일체의 물품, 그 모두는 광린포체께 전달되어야 한다. 찻잔 하나라도 빠짐없이 광린포체께 전해 드리고자 한다.
3. 불광법회의 발심출가자 은공(恩工)스님께 맡깁니다.
은공스님은 출가자로서 불교에 대한 보다 깊은 책임을 자담하고 수행하되 광덕스님의 ‘새불교운동’만이 미래 한국불교의 바른 길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정진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 절을 맡아 가람수호와 전법불사를 짓되 내가 만들어 놓은 여러 자료를 토대로 삼아 주세요. 그리고 광린포체께서 출가하시어 여기로 오실 때 이 절과 내가 맡긴 모든 것[일과 물건]을 그 분께 드려 ‘새불교운동’의 터전으로 삼을 수 있도록 당부합니다.
이 절의 일들을 정리할 때는 ‘수미산 인연’과 ‘유공자’와 의논하여 그들의 협력을 얻으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절과 불광사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안심해도 됩니다. 년 전에 내가 불광사에 찾아가 이 절을 불광사 기도처로 받을 것을 제안했지요. 그 이유는 선사의 처음 뜻이 그러했기 때문이었어요. 그 후 책임자와 신도대표들이 두어 차례 다녀갔습니다. 그리곤 지금까지 그들은 일절 함구했고, 세월 속에서 자연스레 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관계가 끝난 것으로 정리되었습니다. 물론 내 상좌와도 상관없는 일입니다.
4. 임종은 평소 살던 곳에서
혹시 (나의 뜻과 관계없이) 나의 병세가 위중하여 병원에 입원해 있을 경우, 임종의 기미가 보이면 얼른 집[절]으로 데려가 달라. 이 때 내 몸에 붙이고 있는 모든 의료기기는 떼어내야 한다. 크고 넓고 깨끗한 방, 중앙 조금 높은 곳에 나를 편히 눕혀라. 나를 아는 사람들이 빙― 둘러 앉아 선정 가운데서 임종하는 나의 모습을 통관(洞觀)하라. 그러나 염불을 해도 좋다. 염불은 합송으로 하되 일제히 정중하고 장엄한 소리로 하라.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라. 임종을 맞이한 뒤에도 한동안 계속해라. 그리고 내가 살면서 잘한 일을 아는 대로 차근차근 성의있고 진지하게 말해 달라. 내가 평소 서원했던 일을 말해 달라. 이 때 주의할 일은 눈물을 흘리거나 슬픈 소리를 짓지 않아야 한다. 그런 뒤에 범종을 울려라.
5. 그 후 10시간은 내 몸에 손을 대지도 말고 옮겨서도 안 된다.
내가 완전히 숨을 멈춘 지 10시간은 그대로 두라. 정신이 단계별로 육신을 벗어날 것이다. 정신이 계발될수록 몸을 이탈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거듭 말하거니와 임종 후 10시간 안에는 내 몸을 흔들거나 내 얼굴에 눈물을 흘리거나 울음소리를 내어서는 안 된다. 넋두리나 푸념을 해서도 안 된다. 밝고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나를 자유롭게 보내 달라. 남아 있는 사람들 각자의 일[심정]로 나의 길을 막지 말라. 그러고 보니 은근한 음악도 좋겠구나.[보현행원송 등]
그 이후 영안실이나 장례식장을 가든지 바로 시신을 치우든지 살아있는 사람들 마음대로 해라. 애써 3일장까지 갈 것 있겠나. 요점은 ‘번거롭게 하지 말라’이다. 왔으니 가야하고, 조용히 왔으니 조용히 가야 함은 정한 이치다.
6. 시신[法軀]에 대한 절차
염습은 약해도 좋다. 내가 범어사에서 처음 계를 받을 때[1971년] 절에서 해준 광목장삼을 지금껏 보관해 왔다. 그걸 마지막으로 입고 가려고. 찾아서 내 몸에 입히면 된다. 다시 와서 출가수행자가 되기 위한 나의 다짐이다. 아니, 선사를 뵈올 나의 맹서이다. 난 다음 생에도 선사를 뵙고 선사의 가르침을 따라 살 것이다. 부디 따로 다비장을 차리지 말고 일반 화장터로 가라. 숨 멈춘 지 10시간이 지나면 어느 때도 좋겠구나.
7.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혼자 왔지 않은가. 그동안 은혜 속에서 과분하게 잘 살다가 가야할 때는 혼자 조용히 가야 한다고 본다. 그걸 여여하다고 말해도 될까.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번거로움을 싫어한다. 그런데도 머리를 숙이고 주억주억 오는 것은 품앗이다. 자신이 죽었을 때도 오라는 말이지. 난 그런 걸 싫어한다. 고인의 인품에 대한 그리움으로 와야지 기껏 품앗이 정도의 걸음이라면 거절하고 말겠다. 아무쪼록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수고를 좀 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고 과분하다. 그 외의 사람들을 귀찮게 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도 닦을 시간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8. 재는 조촐하고 격식을 갖추어서 정성껏 지내라.
유골은 모란동산 ‘미타 15번’에 49재 날 안치해라. 물론 49재를 지내라. 이 때 49재로 <보현행원송>을 공연해도 좋겠구나. 재를 지내는 일은 나를 위해서만은 아니다. 또 법보시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재물을 베풀어라. 그리고 해마다 기일 재도 지내라. 비를 세우려거든 지산스님 비 곁에 자그맣게 세우면 된다. 비문(碑文)은, ‘比丘松菴堂至元和上還生道場’으로 해라. 이곳에 다시 태어나서 光린포체의 가르침을 받고, 그 분을 모시며 세세생생 그 분과 보살도를 닦고 닦아 갈 것이다. 금생에 나의 삶과 현재의 뭇 대중과 시방제불보살이 나의 이 원을 증명하실 것이다.
※ 사실, 이 글에는 선사의 노년이 들어있다. 곁에서 바라보며 나도 저렇게 늙어 가리라 했던 각오가 들어있다. 이제 시간이 좀 지난 뒤 다시 생각하고 정리하여 썼을 뿐이다. 내 자신이 수시로 읽고 다짐하기 위해서. (그렇지만 내 깜냥의 글이다.)
그리고 잘 늙으려면 젊은 시절부터 잘 살아야 한다. 혹시 이 글이 잘 살고픈 젊은이들에게 미래의 삶[노년]을 바라보는 조그마한 거울의 역할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금생의 인연자들이 서로 헤어져도 관계성[인연: 서원 등]만 있으면 상황에 따라 역할에 따라 당처(當處: 그 때 그곳)의 일로[時節因緣成熟] 얼마든지 만나게 된다. 보살도의 상속을 염려치 말자. 부처님의 한 마디 짧은 말씀 속에도 원만행과 삼매와 지혜가 구족하시다.
도 깨달아서 나중에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을 짓지 말자. 때로는 부처님 말씀 한 구절도 감당을 못하지 않는가? 이에 뭘 더 깨달아야 하고 뭘 더 얻어야만 하는가? 번연히 세 끼 밥 먹으면서 밥값도 하지 않은 채 세상의 은혜를 자꾸만 미루거나 저버리면 안 된다. 미처 깨닫기도 전에 악도에 떨어질까 염려 된다.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보고 듣고 깊이 살피면 따로 구하지 않아도 된다. 부처님 말씀 한 구절에도 계와 선정과 지혜가 동시에 원만구족하시다. 각성하여 통관(洞觀)하라.
2555(2011)년 9월 1일
妙香臺에서 육십[내년]을 바라보며
松菴至元 合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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